여러분은 ‘정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착한 것? 선한 것? 과연 정의에 정답이 있을까요? 우리는 각자마다의 정의를 품고 살고 있습니다. 그 정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혜화랩에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를 바라보고, 어떤 것이 정의롭고, 정의롭지 않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모듈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 중 하나로, 영화 전문 기자 백은하 님과 영화를 통해 '정의'를 만나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눕니다.
정의의 모순
정의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개인마다, 상황마다, 시대에 따라서, 역사 안에서도 모두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정의는 사실 조금 더 다수의 사람들이 편하게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전반적으로 정해 온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인데, 시대의 패러다임이, 혹은 시대의 승자가 바뀔 때,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가 바뀌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평가한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처럼 어떤 역사 안에서 정의로움은 또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결국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선하다고 해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고, 악하다고 해서 이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정의는 누군가에게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묻게 되는 영화가 바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입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영화 줄거리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브루노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브루노의 집 뒷마당에는 나치 포로수용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뒷마당에서 노는 것 또한 금지됩니다. 브루노는 반유대주의와 나치 독일의 선전에 대한 의제를 추진하는 개인 교사 리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브루노는 그가 본 유대인이 리스트의 가르침에 나오는 반유대적 캐리커처를 닮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브루노는 부모에게 반항하여 뒷마당을 빠져나와 숲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슈무엘이라는 또래 소년과 친구가 됩니다. 브루노는 슈무엘과 다른 죄수들이 입는 줄무늬 옷이 파자마라고 생각하고, 줄무늬 죄수복과 모자를 쓰고 울타리 밑을 파서 수용소 철조망 안으로 들어갑니다. 가족들은 브루노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었고, 울타리 근처에서 그의 옷을 발견합니다. 브루노와 슈무엘, 그리고 다른 수감자들이 ‘샤워'를 위해 옷을 벗었고, 모두 가스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병사가 알갱이를 가스실로 쏟아부었고, 죄수들은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문을 두드립니다. 이내 침묵한 가스실의 문을 보여주며 브루노를 포함한 가스실 안의 모든 죄수들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화 ‘동주'를 보면 시인이자 독립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계속해서 고문하고, 압박하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이 장면들을 보았을 때, '과연 저 이야기가 일본인들이 봤을 때는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말하자면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반항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개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가 혹은 정부가, 그 나라가 원하는 정의들을 참이라고, 선이라고 믿게끔 하는 방식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애국자인 사람이, 반대에서는 테러리스트인 경우들이 있는 것처럼요. 그 안에서 정의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예술품들이 사실 약탈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예술 안에서 정의는 어디의 편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시대와, 혹은 누군가의 입장과, 혹은 다수인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인간이 그래도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 넘어가지 말아야 되는 선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럴 때 ‘정의’가 어떤 누구에게도 변명의 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부분들이기도 하지만 시시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힘이라는 것을 갖고 있고, 어떤 단체, 나라나 시대, 사상이라는 것은 희망을 가지고 있고,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이것이 정의라고 보이게끔 하는 행동들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 영화 속에서도 나오는 방식의 교육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영화에서는 이런 프로파간다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Propaganda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브루노의 아버지가 포로수용소에서는 아주 행복한 삶이 벌어지고 있다는 식의 영화를 만들어서 내부 군인들과 함께 시사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브루노는 아빠가 나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영화를 보고 완전히 설득을 당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 브루노의 천진하고 기쁜 얼굴과 달리 어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영상이 거짓인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미 이 역사의 시대를 지나왔고, 그때 그들이 했던 행동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저것이 명백한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전쟁 한가운데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을 때 저런 선전 영화를 본다면 별다른 일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프로파간다’라는 표현을 쓰며, 우리말로는 ‘선전’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종교나 도덕적, 사상적, 혹은 경제적인 부분들이나 흔히 말하는 포교 활동으로 누군가를 설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레토릭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프로파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세대에서 아직도 광고를 선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선전 영상은 힘 있는 정복한 자들에 의해서 제작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어떤 정의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경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프로파간다'라는 말 자체가 원 뜻이 무엇이었든 간에 큰 세계 전쟁을 겪고 미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그런 프로파간다 영상은 진실과도 거리가 멀고, 영화라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실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더 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영화로는 [인생은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파시즘이라는 것과 함께 반유대주의를 이끌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에 일조했던 곳입니다. 여기서 이탈리아어를 쓰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귀도라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는 그의 아이에게 ‘지금 이 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거대한 게임이야. 아빠랑 같이 게임을 하자.’ 합니다. 그의 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속이기가 쉬웠습니다. 아이는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실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마지막까지 이것이 아빠와 함께하는 숨바꼭질이며,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빠가 아이를 숨겨놓고, 아빠 본인이 병사에게 끌려가는 모습도 즐거운 게임처럼 생각하도록 미소를 지으면서 잘 숨어있으라고 하며 떠나게 됩니다. 아이가 아빠를 보는 마지막 모습이었을 테지만, 아이는 그냥 아빠와의 즐거운 놀이로 생각하는 장면으로서 아름다우면서도 너무나도 슬픈 장면을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이 안에서의 정의라는 것들은 또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이 영화는 또 하나의 전쟁, 홀로코스트와 시대의 아픔들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끔 만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화가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제이미가 전쟁 피란 중 부모의 손을 놓쳐 포로수용소로 들어가게 되며, 그야말로 처참하게 그 안에서 생존을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도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굉장히 비슷하게 철책을 앞에 놓고 일본인 소년 병사와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소년은 결국에는 가미카제, 즉 자살 병이 돼서 아주 비장한 마음으로 그들이 생각한 적진을 향해서 달려드는 그런 비극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던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와 정의
이런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영화라는 것이 정의의 편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영화가 한쪽의 정의의 편만 든다면, 그건 프로파간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신 그 정의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의 정의가 아닐까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더욱더 전쟁이든 정치든 어떤 사건이든 학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든 아니면 어떤 사랑의 이야기든, 모든 생명들의 순간을 보여주는 정의 속에 끼여 있는 어떤 얼굴들을 보여주는 게 영화인 것 같아요.
배우와 정의
강의를 준비하고, 제가 하고 있는 일들과 연결을 하면서 배우라는 사람들이 결국 하는 일은 다양한 정의를 담은 인간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영상 위로, 영화 안으로 불러오고 복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치를 연기하는 배우 혹은 무력한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의 개인적인 정의는 자신들이 맡은 역할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정의는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아주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이 반대의 독재자를 연기하는 경우들도 분명히 있기도 하고요. 그것은 개인의 정의하고 상관없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우리에게 그 얼굴을 설득시키는 작업까지도 해야 되는 사람들인 거죠. 영화 속에서는 영웅도 있고 거기에 반하는 그런 악당들도 있기 마련이고 혹은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다양성이나 그것에 대해서 관객들이 생각하는 것들에 있어서 그걸 더 진지하고 깊게, 제대로 고민하게끔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내 안에 정의하고 가끔 반대되는 일까지도 해야 되는 사람들, 그러면서 그 얼굴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배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저는 항상 제가 하고 있는 일 안에서 배우가 좋아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정신을 모든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그것들을 이용해서 약간의 고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렇기에 특히나 이런 전쟁 영화나 혹은 비극적인 영화들 속에서 그 캐릭터들을 연기해 내는 배우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존경심을 느낍니다.
물론 영화가 계속해서 많은 방식의 정의들을 이야기하고 다루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제가 연구하고 일하고 있는 배우의 일과 어떻게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을 통해 아이의 얼굴부터 어른들의 배우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왜 영화라는 곳에서 배우의 얼굴들이 작동을 해야 하는가, 그들이 하고 있는 역할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명확한 정의
사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이야기들을 보면 주인공은 주로 선의 입장을 띠고 있고, 주인공과 대비되는 사람들을 악이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정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주인공이 진짜 선의 입장인가라고 이제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 대부분 선악의 정의가 불명확했습니다. 그게 좋은 영화의 선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를 절대 선처럼 보이게끔 하고, 어떤 나쁜 사람은 절대 악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영화야말로 납작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영화는 선과 악 혹은 그 경계에 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락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 안에서도 '과연 정의라는 게 선악의 개념인가'에 대한 부분들까지 생각하도록 만드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킹스맨]이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킹스맨에서 인류가 점점 인구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한 번에 날려버려서 전체 지구를 살릴 수 있다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경우의 사람의 이야기도, 내가 설득이 안 될지라도, 그들이 그 행동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우리가 보게 할 수 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단순히 예술 혹은 상업, 오락 영화와 상관없이 모든 영화의 요소 안에서는 그런 어떠한 것들만을 정의라고, 또는 어떤 것만이 완벽한 선이라고 규정짓는 영화는 위험하고 좋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라는 선 안에 들어온 영화들은 시청자에게 판단하게끔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1987]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 김윤석 씨가 연기하는 '박 처장'이라는 캐릭터는 분명한 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이 캐릭터가 어떻게 시대적인 괴물이 되어 버렸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제 정의가 그가 했던 행동들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이 영화는 다른 정의를 정의라고 믿고 살아왔던 사람이 왜 그런 악마가 되었는지를 보여주어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저런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반면교사의 부분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의는 본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충분히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기의 자신의 정의관에 따라 판단하고, 더 나은 정의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정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착한 것? 선한 것? 과연 정의에 정답이 있을까요? 우리는 각자마다의 정의를 품고 살고 있습니다. 그 정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혜화랩에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정의를 바라보고, 어떤 것이 정의롭고, 정의롭지 않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는 모듈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관점 중 하나로, 영화 전문 기자 백은하 님과 영화를 통해 '정의'를 만나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나눕니다.
정의의 모순
정의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개인마다, 상황마다, 시대에 따라서, 역사 안에서도 모두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정의는 사실 조금 더 다수의 사람들이 편하게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것을 전반적으로 정해 온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인데, 시대의 패러다임이, 혹은 시대의 승자가 바뀔 때,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가 바뀌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평가한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처럼 어떤 역사 안에서 정의로움은 또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은 결국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선하다고 해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고, 악하다고 해서 이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정의는 누군가에게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묻게 되는 영화가 바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입니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영화 줄거리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브루노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브루노의 집 뒷마당에는 나치 포로수용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뒷마당에서 노는 것 또한 금지됩니다. 브루노는 반유대주의와 나치 독일의 선전에 대한 의제를 추진하는 개인 교사 리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브루노는 그가 본 유대인이 리스트의 가르침에 나오는 반유대적 캐리커처를 닮지 않아 매우 혼란스러워합니다. 브루노는 부모에게 반항하여 뒷마당을 빠져나와 숲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슈무엘이라는 또래 소년과 친구가 됩니다. 브루노는 슈무엘과 다른 죄수들이 입는 줄무늬 옷이 파자마라고 생각하고, 줄무늬 죄수복과 모자를 쓰고 울타리 밑을 파서 수용소 철조망 안으로 들어갑니다. 가족들은 브루노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었고, 울타리 근처에서 그의 옷을 발견합니다. 브루노와 슈무엘, 그리고 다른 수감자들이 ‘샤워'를 위해 옷을 벗었고, 모두 가스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병사가 알갱이를 가스실로 쏟아부었고, 죄수들은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문을 두드립니다. 이내 침묵한 가스실의 문을 보여주며 브루노를 포함한 가스실 안의 모든 죄수들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영화 ‘동주'를 보면 시인이자 독립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일본 경찰들이 그들을 계속해서 고문하고, 압박하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이 장면들을 보았을 때, '과연 저 이야기가 일본인들이 봤을 때는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말하자면 이렇게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반항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개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가 혹은 정부가, 그 나라가 원하는 정의들을 참이라고, 선이라고 믿게끔 하는 방식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애국자인 사람이, 반대에서는 테러리스트인 경우들이 있는 것처럼요. 그 안에서 정의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예술품들이 사실 약탈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예술 안에서 정의는 어디의 편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런 시대와, 혹은 누군가의 입장과, 혹은 다수인가 아닌가와 상관없이, 인간이 그래도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들, 넘어가지 말아야 되는 선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럴 때 ‘정의’가 어떤 누구에게도 변명의 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부분들이기도 하지만 시시때때로 많은 사람들이 힘이라는 것을 갖고 있고, 어떤 단체, 나라나 시대, 사상이라는 것은 희망을 가지고 있고,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이것이 정의라고 보이게끔 하는 행동들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이 영화 속에서도 나오는 방식의 교육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영화에서는 이런 프로파간다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Propaganda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 브루노의 아버지가 포로수용소에서는 아주 행복한 삶이 벌어지고 있다는 식의 영화를 만들어서 내부 군인들과 함께 시사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브루노는 아빠가 나쁜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영화를 보고 완전히 설득을 당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 브루노의 천진하고 기쁜 얼굴과 달리 어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 영상이 거짓인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미 이 역사의 시대를 지나왔고, 그때 그들이 했던 행동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저것이 명백한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전쟁 한가운데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을 때 저런 선전 영화를 본다면 별다른 일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프로파간다’라는 표현을 쓰며, 우리말로는 ‘선전’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종교나 도덕적, 사상적, 혹은 경제적인 부분들이나 흔히 말하는 포교 활동으로 누군가를 설득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레토릭 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프로파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세대에서 아직도 광고를 선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선전 영상은 힘 있는 정복한 자들에 의해서 제작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어떤 정의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먼 경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나 '프로파간다'라는 말 자체가 원 뜻이 무엇이었든 간에 큰 세계 전쟁을 겪고 미디어를 활용할 수 있는 시대를 지나면서 다른 의미로 쓰이게 됩니다. 그런 프로파간다 영상은 진실과도 거리가 멀고, 영화라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실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더 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영화로는 [인생은 아름다워]가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파시즘이라는 것과 함께 반유대주의를 이끌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에 일조했던 곳입니다. 여기서 이탈리아어를 쓰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귀도라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는 그의 아이에게 ‘지금 이 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거대한 게임이야. 아빠랑 같이 게임을 하자.’ 합니다. 그의 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속이기가 쉬웠습니다. 아이는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실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마지막까지 이것이 아빠와 함께하는 숨바꼭질이며,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빠가 아이를 숨겨놓고, 아빠 본인이 병사에게 끌려가는 모습도 즐거운 게임처럼 생각하도록 미소를 지으면서 잘 숨어있으라고 하며 떠나게 됩니다. 아이가 아빠를 보는 마지막 모습이었을 테지만, 아이는 그냥 아빠와의 즐거운 놀이로 생각하는 장면으로서 아름다우면서도 너무나도 슬픈 장면을 만들어낸 영화입니다. 이 안에서의 정의라는 것들은 또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이 영화는 또 하나의 전쟁, 홀로코스트와 시대의 아픔들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끔 만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영화가 [태양의 제국]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 제이미가 전쟁 피란 중 부모의 손을 놓쳐 포로수용소로 들어가게 되며, 그야말로 처참하게 그 안에서 생존을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도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과 굉장히 비슷하게 철책을 앞에 놓고 일본인 소년 병사와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소년은 결국에는 가미카제, 즉 자살 병이 돼서 아주 비장한 마음으로 그들이 생각한 적진을 향해서 달려드는 그런 비극적인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던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와 정의
이런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과연 영화라는 것이 정의의 편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영화가 한쪽의 정의의 편만 든다면, 그건 프로파간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신 그 정의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화의 정의가 아닐까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더욱더 전쟁이든 정치든 어떤 사건이든 학교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든 아니면 어떤 사랑의 이야기든, 모든 생명들의 순간을 보여주는 정의 속에 끼여 있는 어떤 얼굴들을 보여주는 게 영화인 것 같아요.
배우와 정의
강의를 준비하고, 제가 하고 있는 일들과 연결을 하면서 배우라는 사람들이 결국 하는 일은 다양한 정의를 담은 인간의 얼굴을 스크린으로, 영상 위로, 영화 안으로 불러오고 복구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치를 연기하는 배우 혹은 무력한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의 개인적인 정의는 자신들이 맡은 역할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정의는 그게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아주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이 반대의 독재자를 연기하는 경우들도 분명히 있기도 하고요. 그것은 개인의 정의하고 상관없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정의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우리에게 그 얼굴을 설득시키는 작업까지도 해야 되는 사람들인 거죠. 영화 속에서는 영웅도 있고 거기에 반하는 그런 악당들도 있기 마련이고 혹은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다양성이나 그것에 대해서 관객들이 생각하는 것들에 있어서 그걸 더 진지하고 깊게, 제대로 고민하게끔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내 안에 정의하고 가끔 반대되는 일까지도 해야 되는 사람들, 그러면서 그 얼굴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배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저는 항상 제가 하고 있는 일 안에서 배우가 좋아서 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 육체를, 정신을 모든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그것들을 이용해서 약간의 고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렇기에 특히나 이런 전쟁 영화나 혹은 비극적인 영화들 속에서 그 캐릭터들을 연기해 내는 배우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존경심을 느낍니다.
물론 영화가 계속해서 많은 방식의 정의들을 이야기하고 다루고 있지만, 과연 이것이 제가 연구하고 일하고 있는 배우의 일과 어떻게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을 통해 아이의 얼굴부터 어른들의 배우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왜 영화라는 곳에서 배우의 얼굴들이 작동을 해야 하는가, 그들이 하고 있는 역할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명확한 정의
사실 영화나 드라마 등의 이야기들을 보면 주인공은 주로 선의 입장을 띠고 있고, 주인공과 대비되는 사람들을 악이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정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 주인공이 진짜 선의 입장인가라고 이제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 대부분 선악의 정의가 불명확했습니다. 그게 좋은 영화의 선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를 절대 선처럼 보이게끔 하고, 어떤 나쁜 사람은 절대 악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영화야말로 납작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영화는 선과 악 혹은 그 경계에 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락 영화라고 불리는 작품 안에서도 '과연 정의라는 게 선악의 개념인가'에 대한 부분들까지 생각하도록 만드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킹스맨]이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킹스맨에서 인류가 점점 인구 포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한 번에 날려버려서 전체 지구를 살릴 수 있다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경우의 사람의 이야기도, 내가 설득이 안 될지라도, 그들이 그 행동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우리가 보게 할 수 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단순히 예술 혹은 상업, 오락 영화와 상관없이 모든 영화의 요소 안에서는 그런 어떠한 것들만을 정의라고, 또는 어떤 것만이 완벽한 선이라고 규정짓는 영화는 위험하고 좋지 않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라는 선 안에 들어온 영화들은 시청자에게 판단하게끔 만들어줍니다. 예를 들어 [1987]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 김윤석 씨가 연기하는 '박 처장'이라는 캐릭터는 분명한 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이 캐릭터가 어떻게 시대적인 괴물이 되어 버렸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제 정의가 그가 했던 행동들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이 영화는 다른 정의를 정의라고 믿고 살아왔던 사람이 왜 그런 악마가 되었는지를 보여주어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관객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저런 악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반면교사의 부분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정의는 본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충분히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기의 자신의 정의관에 따라 판단하고, 더 나은 정의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